수염없는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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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인애
작성일 10-03-30 11:18
조회 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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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숲 속 나라에 호랑이 임금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흠! 흠흠!"
호랑이 임금은 숱이 많고 옆으로 길게 뻗은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난 호랑이 임금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뭐하고 있어? 빨리빨리 점심상을 대령하지 않고!"
"예예, 지금 곧 대령하겠사옵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어서! 그런데 오늘 반찬은 뭐냐?"
식사를 나르는 일을 하는 여우가 굽실굽실 절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오늘은 아주 특별한 요리입니다. 바다에 사는 상어의 지느러미 요리입니다. 임금님."
밥을 먹으면서도 호랑이는 간이 짜네 다네 맛이 있네 없네 잔소리를 해댔습니다.
숲 속 나라 짐승들은 무슨 일이든지 모두 호랑이 임금을 위해 해야했습니다. 사과나무를 기르는 사슴이 가장 굵고 잘 익은 사과를 골라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호랑이임금은 냅다 소리치며 사과 광주리를 던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못생긴 사과를 임금인 내게 가져왔단 말이냐? 더 굵고 잘 익은 사과를 가져오란 말이야."
여름 장마로 빨래를 말리지 못한 멧돼지가 잠옷을 불에 쬐어서 겨우 말려서 가지고 갔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슬쩍 만져보더니 소리치며 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획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축축한 옷을 나더러 입으란 말이냐? 차라리 젖은 옷을 그냥 입겠다."
태풍이 불어온다는 소문을 듣고도 상어 알 요리가 먹고 싶다며 불쌍한 노루 형제를 멀리 바다로 내보냈습니다. 결국 노루 형제는 석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호랑이 임금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호랑이 임금에게 조금만 듣기 싫은 말을 했다가는 얼음산으로 쫓겨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얼음산은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런 호랑이 임금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저 아래 마을에 사는 박포수였습니다. 박포수가 나타나면 동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만은 호랑이 임금이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이런 고얀 것들! 이 임금을 놔두고 도망을 가!"
하면서도 호랑이 임금은 어쩐 일인지 박포수만 보면 다리가 떨리고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제까짓 게! 덩치도 작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나처럼 멋진 수염 도 없는 주제에........."
할 뿐 감히 대들지 못하고 비실비실 도망을 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괘씸한 박포수를 이길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호랑이 임금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해 내고는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그날도 박포수는 총을 메고 나타나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호랑이 임금이 박포수를 먼저 보았습니다.
"옳지! 이놈 어디 혼 좀 나 봐라."
호랑이 임금이 등뒤에서 박포수를 덮치려는 순간, 박포수는 등뒤에 눈이라도 있는 듯 획 돌아서더니 '탕!' 총을 쏘았습니다.
"아구구, 호랑이 죽네."
총알은 바로 앞다리를 맞히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침 여름이라 숲이 우거져 있어 겨우 도망치긴 했지만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뼈를 다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짐승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지금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앞다리가 결리고 아팠습니다. 누가 볼 때면 힘을 주어 꼿꼿이 걷지만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풀썩 주저앉아 주물러도 보고 두드려도 보지만 잘 낫질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박포수가 더욱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던 호랑이 임금은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 총만 없으면 제까짓 게 감히 내게 대들지 못할 거야."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 박포수의 총을 훔쳐오기로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지나가고 젊은 남자도 지나갔지만 박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느 집이지?"
바로 그때 저쪽에서 박포수가 걸어왔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박포수가 마주 오던 사람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키가 자그마하고 야윈 노인이었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박포수가 왜 저렇게 굽실거리지? 저 늙은이는 옷도 다 낡은 무명 옷이고 수염도 볼품이 없는데........"
다음 날, 호랑이 임금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오늘은 기어이 박포수의 집을 알아내어 총을 빼앗아와야지.'
생각하며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박포수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옳아, 바로 저 집이었구나."
살며시 담을 넘어 들어가 뒤꼍에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박포수가 마루에 오르더니 넙죽 절을 했습니다. 앞에는 바로 어제 길에서 봤던 그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거 이상하다. 왜 저렇게 굽실거릴까?"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긴 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더니 뻐끔뻐끔 빨았습니다. 어두운 밤이라 빨간 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얼마 후, 불이 꺼지자 '땅땅땅!' 요란하게 꺼진 불씨를 떨었습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호랑이 임금이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 노인은 불을 먹는 노인이었어."
바로 담뱃대 때문에 박포수가 노인을 겁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구해서 박포수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 다."
그날부터 매일 그 노인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할 때면 그 옆 풀숲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또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호랑이 임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담뱃대를 잠시도 몸에서 떼 놓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하긴 뭐 그토록 소중한 것이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어느 덧,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밤마다 앞개울에서는 낮이면 아이들이, 밤이면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옷을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옷을 입은 채로 얼굴과 손발만 씻고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어휴, 저 늙은이는 덥지도 않나?'
이제 노인을 따라 다니는 것이 지겨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어둑해서야 들일을 끝낸 노인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윗마을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윗마을에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따라가 봐야지.'
그런데 개울 위쪽에 이른 노인은 개울을 건너지 않고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드디어 목욕을 하려나 보다. 흐흐흐.'
옷을 다 벗은 노인은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담뱃대까지 놔두고 개울물로 들어갔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이때다 하고 얼른 담뱃대를 들고 달아났습니다.
"히야! 드디어 구했다. 이젠 박포수도 내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걸. 역시 내가 최고라니까. 히히히."
숲의 입구에 있는 연못가에 이르자 빨리 불을 먹어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불을 먹는 것을 보면 모두들 더욱더 나를 우러러보겠지! 아무래도 난 너무 잘났어. 힘세지, 머리 좋고 잘 생겼지, 거기다가 불까지 먹 으니 완벽하지, 암, 완벽하고 말고."
중얼거리며 성냥불을 북 그었습니다.
"왜 이렇게 안 켜지지? 보기에는 쉬웠는데 말이야. 어디 다시 한 번....."
순간 갑자기 번쩍 불꽃이 일어났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깜짝 놀라 불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하필이면 성냥불이 털에 옮겨 붙었지 뭐예요?
"앗 뜨거! 아구구구......"
소리치며 바로 옆에 있는 연못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잖아."
다행히 금방 불이 꺼졌으므로 데지는 않았습니다.
"휴, 다행이다. 어서 돌아가야지."
물 밖으로 나와 담뱃대를 찾아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새 동녘에는 부지런한 여름 해님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여느 때처럼 호통을 쳤습니다.
"여봐라! 이 임금님이 배가 고프구나. 어서 아침상을 올려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짐승들은 모두 흘깃흘깃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아침상을 올리라는데도, 모두 귀머거리라도 된 게야?
그 말에 아기 토끼가 깔깔대며 말했습니다.
"하하하, 웬 시커먼 괴물이 우리 임금님 흉내를 내고 있네."
그러자 짐승들도 제각각 한 마디씩 했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멋진 수염을 가지셨어. 그런데 넌 수염이 한 올도 없잖아."
"그래, 옷도 늘 고급스런 비단만 입고 다니시는데 넌 시커먼 누더기 를 입었네."
평소에 말이 없던 부엉이 할아버지까지 거들었습니다.
"글쎄 말이야. 우리 임금님은 담배도 피우시지 않는데 담뱃대를 가 지고 있네."
부엉이 할아버지의 말에 짐승들은 모두 호랑이 임금에게 대들며 떠들었습니다.
"시커멓고 못생긴 네가 임금님이라고? 말도 안 돼. 진짜 임금님 일 어나시기 전에 썩 꺼지지 못 해!"
짐승들이 한꺼번에 대들며 떠밀어내자 호랑이 임금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숲 속 나라에서 쫓겨나 얼음산으로 도망치며 중얼거렸습니다.
"불은 아무나 먹는 게 아니었어 ......으흐흐흐." (2002년 여름)
*이 동화는 2002년도 '대구 아동 문학 연간집'에 실린 작품임*
"어흠! 흠흠!"
호랑이 임금은 숱이 많고 옆으로 길게 뻗은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난 호랑이 임금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뭐하고 있어? 빨리빨리 점심상을 대령하지 않고!"
"예예, 지금 곧 대령하겠사옵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어서! 그런데 오늘 반찬은 뭐냐?"
식사를 나르는 일을 하는 여우가 굽실굽실 절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오늘은 아주 특별한 요리입니다. 바다에 사는 상어의 지느러미 요리입니다. 임금님."
밥을 먹으면서도 호랑이는 간이 짜네 다네 맛이 있네 없네 잔소리를 해댔습니다.
숲 속 나라 짐승들은 무슨 일이든지 모두 호랑이 임금을 위해 해야했습니다. 사과나무를 기르는 사슴이 가장 굵고 잘 익은 사과를 골라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호랑이임금은 냅다 소리치며 사과 광주리를 던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못생긴 사과를 임금인 내게 가져왔단 말이냐? 더 굵고 잘 익은 사과를 가져오란 말이야."
여름 장마로 빨래를 말리지 못한 멧돼지가 잠옷을 불에 쬐어서 겨우 말려서 가지고 갔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슬쩍 만져보더니 소리치며 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획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축축한 옷을 나더러 입으란 말이냐? 차라리 젖은 옷을 그냥 입겠다."
태풍이 불어온다는 소문을 듣고도 상어 알 요리가 먹고 싶다며 불쌍한 노루 형제를 멀리 바다로 내보냈습니다. 결국 노루 형제는 석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호랑이 임금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호랑이 임금에게 조금만 듣기 싫은 말을 했다가는 얼음산으로 쫓겨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얼음산은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런 호랑이 임금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저 아래 마을에 사는 박포수였습니다. 박포수가 나타나면 동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만은 호랑이 임금이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이런 고얀 것들! 이 임금을 놔두고 도망을 가!"
하면서도 호랑이 임금은 어쩐 일인지 박포수만 보면 다리가 떨리고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제까짓 게! 덩치도 작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나처럼 멋진 수염 도 없는 주제에........."
할 뿐 감히 대들지 못하고 비실비실 도망을 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괘씸한 박포수를 이길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호랑이 임금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해 내고는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그날도 박포수는 총을 메고 나타나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호랑이 임금이 박포수를 먼저 보았습니다.
"옳지! 이놈 어디 혼 좀 나 봐라."
호랑이 임금이 등뒤에서 박포수를 덮치려는 순간, 박포수는 등뒤에 눈이라도 있는 듯 획 돌아서더니 '탕!' 총을 쏘았습니다.
"아구구, 호랑이 죽네."
총알은 바로 앞다리를 맞히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침 여름이라 숲이 우거져 있어 겨우 도망치긴 했지만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뼈를 다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짐승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지금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앞다리가 결리고 아팠습니다. 누가 볼 때면 힘을 주어 꼿꼿이 걷지만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풀썩 주저앉아 주물러도 보고 두드려도 보지만 잘 낫질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박포수가 더욱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던 호랑이 임금은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 총만 없으면 제까짓 게 감히 내게 대들지 못할 거야."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 박포수의 총을 훔쳐오기로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지나가고 젊은 남자도 지나갔지만 박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느 집이지?"
바로 그때 저쪽에서 박포수가 걸어왔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박포수가 마주 오던 사람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키가 자그마하고 야윈 노인이었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박포수가 왜 저렇게 굽실거리지? 저 늙은이는 옷도 다 낡은 무명 옷이고 수염도 볼품이 없는데........"
다음 날, 호랑이 임금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오늘은 기어이 박포수의 집을 알아내어 총을 빼앗아와야지.'
생각하며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박포수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옳아, 바로 저 집이었구나."
살며시 담을 넘어 들어가 뒤꼍에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박포수가 마루에 오르더니 넙죽 절을 했습니다. 앞에는 바로 어제 길에서 봤던 그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거 이상하다. 왜 저렇게 굽실거릴까?"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긴 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더니 뻐끔뻐끔 빨았습니다. 어두운 밤이라 빨간 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얼마 후, 불이 꺼지자 '땅땅땅!' 요란하게 꺼진 불씨를 떨었습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호랑이 임금이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 노인은 불을 먹는 노인이었어."
바로 담뱃대 때문에 박포수가 노인을 겁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구해서 박포수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 다."
그날부터 매일 그 노인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할 때면 그 옆 풀숲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또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호랑이 임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담뱃대를 잠시도 몸에서 떼 놓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하긴 뭐 그토록 소중한 것이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어느 덧,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밤마다 앞개울에서는 낮이면 아이들이, 밤이면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옷을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옷을 입은 채로 얼굴과 손발만 씻고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어휴, 저 늙은이는 덥지도 않나?'
이제 노인을 따라 다니는 것이 지겨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어둑해서야 들일을 끝낸 노인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윗마을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윗마을에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따라가 봐야지.'
그런데 개울 위쪽에 이른 노인은 개울을 건너지 않고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드디어 목욕을 하려나 보다. 흐흐흐.'
옷을 다 벗은 노인은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담뱃대까지 놔두고 개울물로 들어갔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이때다 하고 얼른 담뱃대를 들고 달아났습니다.
"히야! 드디어 구했다. 이젠 박포수도 내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걸. 역시 내가 최고라니까. 히히히."
숲의 입구에 있는 연못가에 이르자 빨리 불을 먹어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불을 먹는 것을 보면 모두들 더욱더 나를 우러러보겠지! 아무래도 난 너무 잘났어. 힘세지, 머리 좋고 잘 생겼지, 거기다가 불까지 먹 으니 완벽하지, 암, 완벽하고 말고."
중얼거리며 성냥불을 북 그었습니다.
"왜 이렇게 안 켜지지? 보기에는 쉬웠는데 말이야. 어디 다시 한 번....."
순간 갑자기 번쩍 불꽃이 일어났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깜짝 놀라 불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하필이면 성냥불이 털에 옮겨 붙었지 뭐예요?
"앗 뜨거! 아구구구......"
소리치며 바로 옆에 있는 연못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잖아."
다행히 금방 불이 꺼졌으므로 데지는 않았습니다.
"휴, 다행이다. 어서 돌아가야지."
물 밖으로 나와 담뱃대를 찾아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새 동녘에는 부지런한 여름 해님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여느 때처럼 호통을 쳤습니다.
"여봐라! 이 임금님이 배가 고프구나. 어서 아침상을 올려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짐승들은 모두 흘깃흘깃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아침상을 올리라는데도, 모두 귀머거리라도 된 게야?
그 말에 아기 토끼가 깔깔대며 말했습니다.
"하하하, 웬 시커먼 괴물이 우리 임금님 흉내를 내고 있네."
그러자 짐승들도 제각각 한 마디씩 했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멋진 수염을 가지셨어. 그런데 넌 수염이 한 올도 없잖아."
"그래, 옷도 늘 고급스런 비단만 입고 다니시는데 넌 시커먼 누더기 를 입었네."
평소에 말이 없던 부엉이 할아버지까지 거들었습니다.
"글쎄 말이야. 우리 임금님은 담배도 피우시지 않는데 담뱃대를 가 지고 있네."
부엉이 할아버지의 말에 짐승들은 모두 호랑이 임금에게 대들며 떠들었습니다.
"시커멓고 못생긴 네가 임금님이라고? 말도 안 돼. 진짜 임금님 일 어나시기 전에 썩 꺼지지 못 해!"
짐승들이 한꺼번에 대들며 떠밀어내자 호랑이 임금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숲 속 나라에서 쫓겨나 얼음산으로 도망치며 중얼거렸습니다.
"불은 아무나 먹는 게 아니었어 ......으흐흐흐." (2002년 여름)
*이 동화는 2002년도 '대구 아동 문학 연간집'에 실린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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